현대 건축의 문을 연 빛나는 시대정신,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적은 것은 더 좋은 것이다

“Less is More” 이제는 강력한 메시지가 된 이 문구는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건축 철학을 대변하는 말이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한 구절이기도 한 이 간결한 문구는 “적은 것이 더 풍요로운 것이다”, “장식이 적을수록 의미는 풍부해진다”, “형식을 절제할수록 본질에 가까워진다”, “과거의 양식과 결별할수록 새로운 시대를 더 잘 맞이할 수 있다”라는 다양한 의미도 담고 있다. 말하자면 절제의 미학, 공간이라는 본질에 대한 탐구다.

이 말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개인적인 모토일 뿐 아니라, 20세기 초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가치를 찾고자 했던 근대 건축가들의 이상과 미학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다. 근대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역사적인 건물의 외관과 장식을 흉내내는 관습적인 건축에 대한 반발로 다양한 건축적 운동이 일어난 시기다. 시대는 변했는데 그에 걸맞는 건축 정신은 실현되지 않았으니, 건축과 예술은 퇴행하는 듯했다. 예술가들과 건축가들은 새로운 시대를 읽어내려 애썼고, 그 결과 나타나는 도시와 사회의 변화에도 주목했다. 그리고 이 흐름은 1920년대에 이르러 국제주의 형식이라는 사조로 통합되며 바야흐로 현대 건축의 한 장을 열었다. 유리와 철이라는 재료의 발견과 기술의 혁신, 새로운 가치는 아방가르드 예술가와 건축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비전을 그려내게 했다.

건축은 시대 정신의 표현이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바로 이 국제주의 형식의 중심에 있는 건축가다. 흥미롭게도 그는 한번도 건축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고향인 독일 아헨에서 벽돌공이자 석공이었던 아버지에게서 일을 배웠으며 곧 베를린 피터 페렌스의 사무실에서 건축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철골과 유리에 매료된 그는 산업주의과 신고전주의라는 양식을 통합하게 된다. 산업의 재료와 구조와 고전주의의 비례와 형태에 동시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결과 처음 미스를 알린 작품은 완공작이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강력한 이미지를 내포했다. 1922년 그가 프리드리히가 오피스 빌딩 공모전에 제안한 계획안은 20층 규모의 빛나는 글라스타워였다. 유리로 마감된 철골구조의 마천루는 이전에는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를 드러내었다. 마치 유리와 철이라는 새로운 산업 재료를 통해 기술적 완성도와 기계 미학의 가치를 높이 세우는 하나의 선언과도 같았다. “건축은 시대정신의 표현이어야 한다”라는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철학이 새로운 건축 형태로 제안되었다. 지금의 보편적 형태의 초고층 빌딩의 원형이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1927년에 독일 슈투트가르트 바이센호프 주거단지 설계 역시 현대적인 주거의 장을 연 중요한 프로젝트다. 미스를 비롯해, 발터 그로피우스, 르 꼬르뷔지에 등 당대의 젊고 뛰어난 건축가들은 한자리에 모인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는 과거와 결별한 투명하고 현대적인 조형을 가진,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새로운 주거 형태를 제시했다. 당시의 화려한 대리석으로 장식된 육중한 주택에 비해 바이센호프 주거단지의 평지붕을 가진 단촐한 박스 건물은 초라해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형태 안에는 동선을 줄이고 방을 기능적으로 배치하는 등 현대적인 삶의 방식을 담아내고 있었으며, 표준화를 통해 주거의 대량생산 방식을 이룩했다. “우리가 여기에 설계한 것은 집이 아닙니다. 바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삶을 설계하였습니다.” 이 주택을 위한 전시회에서 미스는 이렇게 과거와 결별을 선언했다.

형태는 목적이 아니라 결과이다.

미스는 “형태 그 자체를 위한 형태는 없다”고 전제하고, 형태를 목표로 삼는 형식주의를 거부하는 건축가이기도 했다. 스타일을 얻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스의 건축에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비례와 형태적 완결성이 배어 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미스의 건축 철학, “Less is more”라는 원칙이 건축 형태에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두고 카터는 “시인의 창조적이고 해석적인 이해력으로 작품을 만든 합리주의자”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의 절제된 미학적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대표작은 바로 바르셀로나 파빌리온과 투겐트하트 주택, 그리고 수직타워의 안정적인 비례와 질서를 보여준 시그램 빌딩과 860 레이크 쇼어 아파트다. 무엇보다 현대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는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은 미스의 건축철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파빌리온은 커다란 석재 기단 위에 2개의 에워싸는 벽체로 내부 공간을 형성한다. 벽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8개의 십자형 철재 기둥이 지붕 슬래브를 지지함으로써 구조와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평면 구성은 자유로워졌으며 벽체를 따라 공간은 자연스럽게 흐르게 되었다. 명쾌한 구조를 통해 건축의 요소를 최소화함으로써 공간이 자유로워진 것이다. 투명, 불투명 유리벽을 통해 시각적 소통으로 공간을 흐르게 한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동시에 이 ‘적은 요소들’은 과연 건축인지, 조각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자체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건축은 배경이 되어 주변의 풍경을 끌어들이며 그 결과 더 풍부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이 공간에 적합한 가구를 놓기 위해 미스가 직접 디자인한 바르셀로나 의자는 최소한의 가구로 공간과 사물의 관계까지 절제하고자 했던 미스의 의지를 엿보게 한다. 기둥과 바닥이라는 순수한 구조만 남았고, 장식된 벽이 사라지며 투명한 유리는 내외부가 소통하도록 해 공간은 확장되었다. 건축을 절제함으로써 배경이 되고 그 안의 공간과 사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절제의 미학이다.

Less is more, 미니멀리즘으로 재해석되다.

시대정신을 담은 미스의 절제된 미학은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오면서 현대 도시의 삭막하고 천편일률적인 풍경을 만든 주범으로 몰리기도 했다. 혹은 단조롭고 지루함으로 부정당하기도 했다. 로버트 벤추리는 “적은 것은 지루한 것이다(less is a bore)”라고 풍자했으며, 비토리오 그레고티는 “적은 것은 적은 것이다(less is less)”라는 글에서 모더니즘 이후 형식적인 단순주의를 경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1960년대 미술과 패션, 디자인 분야를 통해 새롭게 재해석되며 하나의 고전으로 승화하게 된다. 최소한으로 절제된 요소를 통해 본질에 다가가려는 그의 태도는 미니멀리즘의 토대가 된 것이다. 디자인평론가인 스티븐 헬러는 미스의 “Less is More”를 인용한 책을 통해 절제의 미학이 귀환했음을 알렸다. 미스의 건축이 스스로 절제함으로써 배경이 되어 주변 자연과 사물과의 관계에서 공간의 연속성과 투명성, 풍요로움을 이끌어내었다면, 미니멀리즘은 기교나 각색을 최소화하고 단순함과 간결한 표현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를 통해 부정했던 모더니즘이 최근 재평가되는 추세와 일본건축을 중심으로 경계에 대한 탐구와 절제된 건축 공간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미스의 건축은 절제를 통해 공간이라는 건축의 본질, 시대 정신, 그 시대의 산업 재료로 구축한 진정성으로 건축을 드러내려 했으며, 시대를 관통하는 절제의 미학을 지님으로써 현대적인 감성을 유지한다. 근대를 가로지르던 정신은 다시 시대를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이끌어낸다.

글_임진영 건축전문기자

네이버 한국인 시리즈 / 언어로 짓는 집, 건축가 김헌

 

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건축가 김헌의 작업을 쉽게 알아본다. 강렬한 사선이 만들어내는 낯선 공간감 때문이다. 건축가 김헌만이 만들 수 있는 원시성, 야성, 폐허의 심성이 담긴 공간이다. 작가 의지로 충만한 형이상학적인 건축가로 비치는 오해도 무리는 아니다. “제 작업에 대해 안 좋게 이야기하는 분도 있어요. 저도 공감해요.(웃음) 좋지 않다는 것은 둘 중 하나에요. 진짜 호감이 안 가거나, 아니면 제대로 뜯어봤거나. 전자는 그럴 수 있는 거고, 후자는 나보다 더 자세히 뜯어봤구나 생각하죠. 그러니까 작가 앞에서 그렇게 자신 있게 이야길 하겠죠. 건축가라고 자신의 건축을 객관적으로 잘 바라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오히려 저에게 제 건축을 좋다고 하면, 도대체 뭘 보고 좋다고 하는 걸까 생각도 해요.(웃음)”

굳이 개의치 않는 이유는 김헌 씨에게 건축은 글쓰기처럼 가장 사적인 내면의 작업이기 떄문이다. 굳이 자신의 건축작업을 공론화하거나 객관화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건축가는 처음부터 지는 게임을 해요. 한계나 조건을 만족시키면서 결과물을 만들어가죠. 그래도 내 앞에 열 번의 생이 있다고 해도 단 한 번도 건축을 양보 못한다고 말하죠. 거창한 의미나 계기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숙명 같은 거예요.” 건축을 잘 하고 유명한 건축가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규정한 건축가의 라이프 스타일로 사는 것이다.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 서울 필운동에서 나고 자라, 북촌의 골목길, 복잡한 도시 조직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다. 하지만 밖에서 아이들과 어울리기보다 글자로 된 모든 것에 마음을 빼앗긴 유년이었다. “글자 자체를 좋아했죠.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한글이건 영어건 금방 알았던 것 같아요. 알파벳이 모여서 이런 소리와 뜻을 만들어내는구나 싶었죠.” 언어에 대한 관심은 중고등학교 신문반을 거쳐 대학교 영자신문반 활동까지 이어진다. 특히 영어에 대한 관심은 학문보다는 문화에 대한 동경이 컸다. “저널리즘에 대한 관심이 컸어요. 건축을 접하기 전까지 당연히 저널을 선택할 줄 알았어요.” 꾸준히 미술반과 신문반, 교지 편집부 활동을 병행했지만, 정작 그의 진로를 결정하게 된 건 고등학교 1학년, 우연한 계기였다.

 “시험 끝나고 영화 보는 낙으로 월말고사나 기말 고사 보던 시절이었죠. 광화문 국제극장에서 당시 타워링 (The Towering Inferno, 1974)이라는 블록버스터를 봤어요. 그때 타워의 중간에 불이 나니까 스티브 맥퀸이 연기한 소방관과 타워를 디자인한 건축가(폴 뉴먼)가 “설계실로 가자”고 해요. 그런데 바닥부터 사람 허리 높이까지 도면이 쌓여있는 거예요. 그림만 그려봤으니 저게 뭔가 싶은 거죠. 도면 자체가 너무 신비롭고 아름다운 거예요. 군더더기나 장식은 하나도 없고, 다 의미고 상징이고 메시지가 있잖아요. 그래픽으로써도 너무나 아름다웠고, 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도 의미가 있죠.” 도면도 아름다웠지만 정작 그를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은 건축가의 면모였다. “갑자기 건축가가 피난 동선을 찾기 위해 그 도면을 뒤지는 거예요. 그 말은 저 많은 정보가 다 저 사람 머리 속에 있다는 거였죠. 그 사실이 가장 큰 충격이었어요. 도면의 아름다움과 정보의 장악, 그것이 건축가구나 싶고 너무 좋았죠.”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보다는 정말 살아볼 만한 삶이다 싶었다.

대학 때는 수업을 거의 듣지 않았다. 시대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권위의식에 가득 찬 분위기가 싫었다. 겨우 받은 학점으로 그는 1983년 23세에 바로 미시건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미시건대학은 미식축구 때문에 좋아했죠. 물론 학점도 안 되었고.(웃음) 건축 명문대학도 많죠. 하지만 저는 지금도 같은 생각이에요. 아무데서나 하면 되지.” 비교적 일찍 떠난 유학기간은 인생에서 밀도 있게 사고하고 관찰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시기였다. “개인적으로는 꽃을 피운 시기였어요. 넓은 시야와 통찰력, 일상과 세계 풍경, 자연을 보는 눈, 도시를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나 유기체로 보는 시각들의 영향을 받았죠. 시골학교지만 그래도 좋은 평가와 인정을 받았죠. 제 자신의 진가를 드러낼 수 있었던 시기였어요.” 졸업 후 몇 년 동안 미국에서 실무를 쌓았다. 하지만 일상이 너무 편안했다. 조직적인 시스템이 작가를 키워낼 환경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결국 그는 변화를 선택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1980년대 미국은 여러 사조가 쏟아지던 시기였다. 하지만 스타일에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그의 관심은 인문, 문학, 다른 장르와의 결합 가능성에 있었다. 지금도 그는 음악에 대해 강연하는 건축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김헌 씨는 강한 건축 형태나 어휘를 표현하는 건축가 중 하나다. “제 안에 내재된 것 같아요. 미술에 대한 경험이 건축의 조형과 만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치열하게 사고하지 않으면 결합을 못 시킨다는 거예요. 그래서 건축은 감각이 아니라 사고의 산물이죠.” 이 과정은 안정이라는 토대에서 얼마나 과감하게 극단을 밀어붙일 것인가에 대한 기획이자 전략이다. “학생들에게도 건축은 기획이라고 가르쳐요. 얼핏 보면 이미지, 형태, 예술적으로 보이지만, 사고와 분석, 통찰과 총합, 피드백과 논리와 일관성, 가치관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추출해내는 종합적인 과정이죠. 이를 물질, 기술, 인문학적 기반 등 여러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니까.” 다만 그는 자신의 기준이 일반인들의 기준이 아니라서 낯설게 보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비평가, 학생, 교수들은 좋아해도 일반인들에게는 흉측하게 보일 수도 있어요. 인기가 없을 수도 있고(웃음)” 하지만 공간을 낯설게 하는 이 태도에 그의 건축관이 놓여있다.

김헌의 건축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은 언어, 선, 그리고 폐허에 대한 그의 내적 심성이다. 그의 건축에서 보이는 사선은 사람들에게 불편함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저는 선을 쓴 거지, 사선을 쓴 건 아니에요.(웃음) 선은 지형이나 상황, 여러 컨텍스트, 내부 프로그램을 소화하기 위해 주변에서 끌어들여온 것이죠.” 자연에서 추출해낸 선을 토대로, 그는 모든 작업에서 하나의 단어, 즉 주제어를 통해 작업의 단서를 잡는다. ‘우연히 뭔가를 발견하는 상황’이란 개념적 어휘인 ‘세렌디피티(serendipity)’나 ‘바로 같은 곳에(at the same place)’란 뜻을 갖는 ‘이비뎀(ibidem)’이 그 예다.

“작업 어휘에요. 제목이 아니라, 주제죠. 순전히 개인적으로 언어로 사고하는 것이 제게 편하기 때문이에요. 법규, 예산, 프로그램, 이런 모든 외적인 측면을 다 해결해 준 다음에 안전하게 제 언어가 들어가는 거죠. 제 작업을 위한 언어니까 사적이고, 약간 친절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언어는 집이라는 말처럼, 건축과 언어는 구조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연결이 된다. 하위구조, 서사, 기억과 인식, 운율, 리듬, 흐름 등 그는 언어를 매개로 건축을 풀어낸다. 그리고 그 결과 만들어지는 건축공간에는 원시성, 날 것과 같은 원형이 담겨 있다. 김헌 씨는 이를 ‘폐허에 대한 자신의 관심’으로 설명한다.

 “폐허에는 매력이 있어요. 건축이나 인공적인 사건이 자연 속에 조심스럽게 깃들어 있는 거죠. 또 폐허는 재미있는 질문을 해요. 이게 생성으로 가는 거냐, 소멸로 가는 거냐. 우리가 볼 때는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다 덧대면 다시 공간이 만들어지는 거거든요. 그런 긴장이 있어요.” 그는 폐허에서 이미지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그 안의 조형이나 요소를 건축에 도입한다. 예를 들자면, 우물과 같은 공동, 브릿지, 경사로, 외부공간, 천창(하늘 창)과 이중 외피 같은 것이다. “실제로는 자연의 경험이죠. 계곡과 관련된 경험, 물이 가지고 있는 유기적인 특징, 명상의 이미지, 시각이 따라 달라지는 경험을 기억시키는 거죠.” 이런 요소들은 공간을 낯설게 하기 위한 장치들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작은 브릿지를 두어 거리감을 유지해 사소한 긴장감과 생명력을 만든다.

“절대로 ‘이대로 살아라’라는 태도는 아니에요. 건축은 시간을 견디는 사건이죠. 달리말하면 인식을 견디는 거죠. 그래서 매번 새로운 사건, 새로운 매력을 경험하게 하는 거죠. 매번 새로울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주는 게 건축가의 역할이에요. 생명력을 지녀야 하니 어렵죠. 사람들의 심리, 정서, 행태에 근거해서 계절, 시간, 자연의 힘을 인식의 변화에 따라서 새롭게 경험하게 하는 거죠. 그러려면 다 숨겨놔야 해요. 매복시켜놔서 한꺼번에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죠.” 수많은 정보를 여러 켜로 재어 놓는 방식, 그의 건축이 낯설고 복잡해 보이는 이유다. 처음에는 낯설지 모르지만 매번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 좋은 건축물이라는 생각이다.

한국에서 처음 발표된 건축가 김헌의 작업은 지금은 사라지로 없는 서교동의 청원주유소다. 이 주유소는 자동차 중심의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도시의 가장 삭막한 풍경 중 하나다. 대지가 큰 도로에 면했기 때문에 최소한 주변과 비슷한 규모와 비례로 연속성을 고려했다. 차의 엔지니어적인 측면을 고려해 하이테크 이미지를 도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여기에 우리 도시환경에서 부족한 외부 공간을 활용했다. 자동차 스케일에서는 인상적인 입면을 만들고 보행자를 고려해 휴먼 스케일에서도 배려했다. 하지만 찌를 듯한 사선을 가진 주유소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드러나는 조형적 이미지보다 도시 환경에 대응하는 책임 의식에 더 무게를 둔다. 그 역시 건축물 하나가 지역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건축은 그 하나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영향권을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해요. 최초의 시작은 인상적인 사건으로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긍정적인 사건으로 기록이 되면 지역에 어떤 분위기가 형성되죠.”

이후 그가 진행한 프로젝트는 보다 사적인 주택이 주를 이룬다. 그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프로젝트는 단연 ‘피넘브러’다. “건축가가 되면 신기한 경험을 하죠. 사람들의 욕구와 최전선에서 부딪히는 게 느껴져요. 특히 주택과 관련해서는 한 사람의 세계가 몰려와요. 방대한 욕구죠. 크기는 작은데 훨씬 방대하고 중압감이 느껴지고 절망감과 시행착오도 커요.” 청평 호수에 면해 지어진 피넘브러는 대자연에 건축을 한다는 중압감이 있었다. 그 지형의 일부로 존재하는 듯하게 하기 위해 내부에는 대지의 경사지를 복원시킨 듯 낭떠러지 같은 공간을 두었다. “외부인지, 내부에 있는 것인지에 대한 감을 흐린다든가, 굉장히 거친 재료를 사용해서 내부에서 다시 자연을 경험하게끔 하고 싶었죠. 계절, 시간에 따라서 건축 자체가 끝없이 스스로 연출하게 하는 것. 그런 세팅을 하는 게 건축가의 몫인 것 같아요.” 물론 정작 사용할 건축주가 불편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는 담담히 인정한다. “인간의 공간에 대한 욕구와 부딪힐 때는 계속될 문제인 것 같아요.”

“저는 작가라고 생각하지만 형태에 관해서 큰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저뿐만 아니라 형태적으로 과감한 건축가들 모두 비슷한 이야길 할 걸요. 내부 논리가 바깥으로 나오면서 혹은 외부 논리가 형태로 드러나는 거죠. 일종의 오브젝트로 생각하진 않아요. 그래도 형태는 건축의 꽃인 것은 맞아요. 저는 곧잘 공간과 형태와 물질과 빛이라는 건축의 요소를 비유해요. 형태는 건축의 꽃, 건축 고유의 영역이죠. 건축의 물질은 이야기, 서사가 되요. 건축의 공간은 작가의 철학이죠. 여기에 빛은 건축의 영혼이죠.”  그래도 결국 건축가는 풍경을 책임지는 사람들이다. 조화와 일관성, 자연에 대한 보편적인 향수. 중립적인 태도와 휴먼 스케일에 대한 고려, 인간의 인식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 “규모가 크면 ‘커서 죄송합니다’라는 제스처가 필요해요. 풍경을 책임지는 역할만으로도 대단한 것 같아요. 최초의 사건만 만들면 그 나머지는 사람이 만들어가죠. 따스하고 인간적인 향취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들어요.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건축은 결국 사람과 관련된 거죠.”

글_임진영 건축전문기자

네이버 한국인 시리즈/자유롭고 대담한 건축, 건축가 민성진

 서울 압구정동의 오퍼스 빌딩은 1999년 당시 천편일률적인 근린생활건물 사이에서 과감한 형태로 주목을 받았다. 건축계의 평도 나뉘었다. ‘탈모더니즘의 건축 미학을 심는’ 신선함에 주목하는 한편, 소위 ‘튀는’ 건축에 대한 비판도 날카로웠다. 이후 성북동 갤러리나 SDA 빌딩, 파주북시티 헤르만 하우스까지, 그의 연작은 언제나 유연하고 과감한 조형을 선보였다. 사람들이 그의 건축에서 표피적인 형태에 주목하는 동안에도, 정작 민성진 씨는 지금껏 애써 자신의 건축에 대해 직접 변론하거나 건축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지 않았다. “형태적으로 자유롭다 보니, 많은 분들은 표피적이고 형태적인 측면을 많이 보세요. 하지만 제게 중요한 것은 건축을 하면서 근원적인 것에 질문을 하는 거죠. 외관은 그 다음 문제인 것 같아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달리 말하면 정신적인 도전이며, 이는 그가 살아온 환경의 영향이다.

부산에서 나고 자라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에 올라와 공부를 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미국 서부 LA로 이른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캘리포니아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하버드대학교 건축대학원에 입학, 미국 서부에서 동부로 옮겼다. 장소가 바뀔 때마다 그는 이질적인 문화적 경험을 했다. “운이 좋아서 초등학교 때부터 30대까지 세계 곳곳에 여행도 많이 다녔어요. 그렇게 다른 문화적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갖는 사고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받아들이게 되었죠. 정신세계, 심리학, 역사,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자연스럽게 인간 사고의 틀을 확장하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 그 내면에 담긴 사고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갖는 것, 그 자유로운 정신세계야말로 민성진을 형성하는 중요한 캐릭터다. “건축 역시 마찬가지에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사고의 틀을 확장하는 것이 제 관심이에요. 그리고 그 옥석을 가려주는 것은 시간의 몫이죠.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판에는 관심이 없어요.”

건축가로서 민성진의 배경은 1980년대 미국 LA에서 출발한다. 당시 LA는 프랭크 게리와 모포시스의 톰 메인이 활동하던 새로운 건축 움직임의 중심지였다. 리차드 마이어의 게티 미술관이나 아라타 이소자키가 설계한 모던아트컨템포러리뮤지엄처럼 좋은 건축물도 지어졌다. ‘태평양 연안의 자유와 열정에 바탕을 둔 개인적인 환상과 경험을 강조’하던 곳이다. 노만 밀러는 이 ‘캘리포니아 건축’이라는 글을 인용해 1980대 LA 유파의 영향을 건축가 민성진 씨의 건축적 토대로 언급하기도 했다. “예기치 못하고 아직 반응양상을 수립하지 못한 형태와 재료에 대한 직관적인 탐구가 존재”한다는 것.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까를로 스까르파와 같은 조각적인 측면도 있었죠. 디테일과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형태적인 자유로움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를 충실하게 다져준 것은 형태적 자유로움보다 태양과 기후, 대지를 보는 방법, 빛, 바람, 단열, 동선, 프로그램의 관계를 다루는 기초에 충실한 건축 태도였다. 특히 빛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실내와 실내의 관계, 조경에 대한 고민, 즉 인간의 환경에 대해 고민하는 태도는 형태 이면에 놓인 중요한 특징이었다.

“랄프 놀슨이라는 교수가 있었어요. 매 학기 태양의 움직임에 대한 수업을 하세요. 한번은 그 분 집에 초대받았죠. ‘겨울에는 이 방에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여름에는 이 방 그늘에 앉아서 커피 마시는 걸 좋아하고, 햇빛을 받으면서 데크에 앉아있는 것을 좋아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죠. 그때 건축에는 감성적인 면, 또 그 반대로 형태적인 면이 공존하는구나라는 생각을 가졌어요.”

하지만 그가 자신의 가장 큰 스승으로 꼽는 것은 프랭크 게리도 탐 메인이 아니다. 바로 재미건축가 손학식 씨다. 하버드 건축대학원을 졸업하고 민성진 씨는 손학식 씨의 사무실에서 5년간 실무를 쌓았다. 건축가 손학식은 프랭크 게리 사무실에서 20년 넘게 오랜 실무를 했다. “캘리포니아대학 설계 수업 때 처음 뵈었죠. 성실하고 인간적인 모습, 디자인에 대한 열정, 건축가로서 해야 할 행실에 대해 배웠어요.” 건축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원칙도 그의 영향이다. 매체나 비판, 칭찬에 동요하지 말고 꾸준히 자신의 작업을 해야 한다고 몸소 보여준 정신적 멘토다. 그가 정신적 스승을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의 사회적 풍토 때문인지 젊은 건축가들이 자신의 이력서를 위해 아무 의미 없는 경력을 만드는 경우가 많아요. 세계적으로 이름있는 건축가의 사무실 여러 곳을 6개월, 1년 짧은 경력만 쌓고 이동하죠. 그렇게 짧은 경력은 의미도 없을 뿐만 아니라 건축적 연관성도 없어요.” 세계적인 건축가의 사무실에서 짧은 기간 실무에 참여한 것만으로 자신의 경력을 부각시키는 일부 경향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경력을 포장하기보다 자신의 건축적 토대를 만들고 진정한 스승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근원적인 질문을 통해 건축을 풀어내기 때문에, 그의 건축은 대담한 형태를 취할지언정 같은 어휘를 적용하지 않는다. 매번 프로젝트에서 의문을 갖고 구조나 프로그램에 대해 새로운 가능성을 도전했다. 드라마 <환상의 커플>을 통해 회자되기도 했던 힐튼 남해 골프 & 스파 리조트는 고전적인 성향 일색인 클럽하우스에 현대적인 해법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형태적으로는 과감했지만, 평당 공사비 600만원에 맞춘 합리적 설계였다. 금강산 골프 & 온천 리조트는 금강산이라는 주변의 뛰어난 풍경에 주목했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한 겸손을 표시해야겠다는 생각이 궁극적인 질문이었다. 그에 따라 건물은 수평적으로 납작 엎드리는 태도를 취한 반면 내부에서는 금강산의 절경을 폭넓게 끌어드리는 트인 공간을 조성했다. 이를 위해 40m에 달하는 무주공간을 목조로 풀어냈다. 모든 접합부가 노출되는 목구조의 디자인을 해결하기 위해 기본부터 다시 공부하고 수많은 디테일을 그려냈다.

복잡하고 어수선한 주변 환경에 대응해 오히려 단순한 형태를 이끌어낸 유엔 빌리지는 상황에 대응하는 결과임을 말해주는 건축이다. 순천 레이크 힐스에서는 건축주의 요구였던 한국적인 건축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고건축을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한국적 선을 현대화하는 형태적, 구조적 실험을 병행했다. 그 결과 한옥의 처마선을 살리려는 디자인 의도를 구조상 역아치 형상으로 풀어냈다. 서교동 자이갤러리는 과연 모델하우스는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해, 실내 중심으로 꾸며지던 틀에서 벗어나 과감한 외부 중정(마당)을 조성했다. 그래서 그는 대지를 답사하고 계획을 이끌어내는 설계 초기 단계에 매우 오랜 시간을 할애한다. 그리고 이를 형태적으로 극대화시킴으로써 마지막을 완성한다.

 “무의미한 제스처가 아니라 형태가 상징하는 가능성을 믿어요. 설계 초기에는 형태를 생각하지 않아요. 제 형태는 프로그램의 완벽함을 추구하면서 빛과 바람, 프로그램, 대지, 주변 상황 조건들을 만족시켜나가는 결과에서 서서히 만들어지죠. 다만 그 형태를 극대화시키고 과감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어요. 구조에 대한 도전, 재료에 대한 도전이죠.” 그의 사무실을 가득 채운 수많은 모형은 그가 공간을 구성하고 실현하는 과정을 통해 3차원 공간감을 연구한 과정을 보여준다.

 

여전히 그는 형태가 왜 그렇게 과감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그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요소다.“형태는 건축가에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고 봐요. 모더니즘이 형태를 잃어버림으로써 엔지니어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준 것이 아닌가 싶어요. 건축가들이 굳이 필요 없어진 거죠. 각각의 기능을 모두 충실하게 만족시키면서도 그것이 하나로 모였을 때, 하나의 캐릭터를 만들고 그 안에서 감정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경험하는 사람이 느낌을 갖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그가 말하는 형태의 극대화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증폭시키는 경험’을 위한 것이다. “한 예로 프랭크 게리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분의 건축은 외부에서 보여지는 형태보다 공간감이 좋아요. 내부의 공간감, 비례, 스케일이 훌륭하죠.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단순히 형태라기보다는 그 안의 공간감, 높이감, 깊이감, 다양한 느낌이 중요해요.” 그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 ‘느낌’은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직접 체험했을 때 더 감동이 오는 건축에 대한 강조다.

오브제로서 강한 형태적 성격을 드러내는 탓에 비판도 없지 않다. “물론 그런 과감한 형태가 도시를 더 어지럽게 한다는 비판, 미국에는 어울리지만 한국 상황에는 맞지 않다는 비판도 있어요. 안 그래도 복잡하다는 거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너무 단조로운 아파트들을 회복하고자 하는 대응인 것 같고요. 단순히 반복되는 것에 대한 저항감, 의문을 갖고 있죠.”

도시는 살아있는 유기체이고, 하나의 건물이 세포 역할을 한다면, 그 건물 하나의 성격으로 인해 주변 지역의 정체성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본다. 노만 밀러 역시 비평을 통해 “우리 도시의 혼돈에서 그의 강렬하고도 대담한 형태가 오히려 역설적으로 주변지역의 정체성을 만들고 혼돈을 차분하게 만든다”고 평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는 도시에 관여하고 싶은 것이 앞으로 건축가로서 그의 관심이기도 하다.

“건축가의 역할은 우리가 사는 현생에서 인생이 펼쳐지는 무대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 무대가 그냥 사각형으로 채워지는 건 의미가 없어요. 개인적으로 영화를 좋아하는데, 영화를 보면 멋진 배경을 찾아 찍어요. 왜 그럴까. 왜 저렇게 멋진 장소를 섭외할까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감정을 증폭시키기 위한 것 같아요.” 공간을 직접 방문하고 경험한 사람들의 감정이 증폭되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의도가 실현된 것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그는 힐튼 남해 골프 & 스파 리조트나 아크로비스타 로비 등 자신이 설계한 건물을 방문한 사람들의 리뷰를 많이 접한다.

“건축가로서 충실하게 건물을 설계하고, 누군가 제가 만든 공간을 경험하고 ‘그곳이 너무 좋았다, 설계한 건축가가 누구냐, 만나고 싶다’고 한다면 그게 제가 원하는 바죠. 그 공간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저에겐 고맙고 중요해요. 그게 건축의 힘인 것 같아요.”

글_임진영 건축전문기자

네이버 한국인 시리즈/ 늘 그곳에 있는 듯한 건축, 건축가 김종규

 건축가 김종규는 건축을 하나의 작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사실 건축물을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은 없어요. 오히려 인식의 대상으로 보는 편이에요. 유럽의 현대건축물을 보며 아, 이 사람들이 만든 거구나 싶은 거죠. 개인적인 성향인지 의도적인지 모르겠지만, 건물 자체가 감동을 준다고 믿지 않아요.” 건축가 김종규의 작업도 감성에 의존하기 보다는 건축적인 논리에 충실하다. 건축의 역할이 삶의 영역을 만들어주는 것이지만 건축 자체만으로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건축에 대한 객관적인 태도 때문에 김종규 씨는 소위 ‘튀는’ 건축 어휘를 자제한다. 최소한의 재료를 사용하고 절제된 형태를 구성한다. “새로 지어졌지만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건축물처럼 만들고 싶었죠. 편안하게 작위적이지 않은 건축,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그 일부분이 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절제된 건축 표현으로 인해 김종규 씨의 프로젝트에는 빛과 관련된 중성적인 공간들이 눈길을 끈다. 재료를 다양하게 대비시키기보다 그 재료의 속성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료를 다양하게 쓰지 않고 투명, 반투명, 불투명으로 변주된 중성적인 공간을 만든다.

학창시절부터 딱히 건축이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술을 더 좋아했다. “중학교 때 미술을 했어요. 제법 그렸죠. 고등학교 때엔 주변 기대에 따라 인기학과에 지원을 했지만 떨어져서 재수를 했어요.” 재수를 하는 기간에서야 그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했다. “미대를 가겠다고 고집할 용기는 없었죠. 당시만 해도 그림을 그리면 밥 굶는다는 인식이 강했으니까. 그러다가 건축이 건설이 아니라 디자인 분야와 밀접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어떻게 보면 그만큼 건축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거죠. 정보도 없었고.” 그렇게 선택한 전공이었지만, 정작 대학에서는 건축을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방임의 건축 교육이었죠(웃음). 건축을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몰랐으니까.” 지금의 4~50대가 그렇듯, 건축가 김종규도 유신 말기에 대학을 다녔다. 정작 전공을 시작해야 할 2학년 때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렸다. 기초 지식도 없이 설계 과제를 집에서 해야 했다. 스터디 그룹을 만들기도 했지만 정보가 워낙 없어서 건축에 대한 갈증 조차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제대로 건축을 배우기 위해 그가 유학을 떠난 곳은 런던의 AA 스쿨이다. “우연히 AA 스쿨에서 나온 책자를 보았어요. 스튜디오 별로 다양한 주제로 수업이 진행되었죠. 건축에 대해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가 가능하구나라는 생각에 무조건 선택했어요.” 1980년대 AA 스쿨은 현대건축의 새로운 실험이 활발하게 이뤄지던 곳이었다. 건축 분야를 넘어 인문학적인 접근, 기술적 접근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이론적인 생산, 건축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실험들이다.렘 콜하스와 자하 하디드가 거쳐간 이 실험들은 이후 10~20년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구체적인 건축물로 실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고된 유학을 말해주는 일화도 있다. “영어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 말로 표현이 안되니까 마지막 프리젠테이션 때는 무조건 그림을 많이 그려서 붙였어요. 당시 비평에 참여한 건축가 피터 윌슨이 끊임없이 질문을 했어요. 영어가 안되니까 대답을 못했죠. 그걸 지켜보던 알빈 보에스키 학장이 한 마디를 했어요. ‘왜 당신은 그림을 못 읽나.’ ‘그림으로 다 설명이 되는데 왜 그렇게 질문을 하느냐’라고.” 그 대신 반박을 해준 것이다. 알빈 보에스키 학장은 AA 스쿨에 보다 자율적인 시스템을 장려해, 실험적인 학풍을 장려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저에게는 AA 스쿨의 학풍이 딱 맞아떨어졌죠. 건축이 전부만은 아니겠구나 생각했어요. 다른 분야와 하이브리드를 하려는 시도들이 많이 나왔어요. 건축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시도들이 좋았어요.” 미술에 관심을 두고 있던 그는 폴 끌레나 자코메티 등 예술 분야와 건축의 접목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 관계에서 지형적 공간, 랜드스케이프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귀국 후 3년 뒤에 치러진 1996년 명동대성당 축성 100주년 기념 공모전은 한국 건축계의 중요한 지점 중 하나다. 이 공모전에서 김종규의 안은 당선작 없는 우수작으로 선정되었다. “명동성당 공모전은 제게 중요한 프로젝트였어요. 개념은 아주 단순해요. 가장 중요한 대상인 명동성당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였어요. 중요한 것은 명동성당 주변의 빈 여유 공간이죠.” 계획안은 명동성당을 만들어주기 위한 베이스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자코메티의 조각이 오브제뿐만 아니라 그 배경이 되는 공간의 관계를 보여주듯, 김종규의 안은 건축물을 오브제로 바라보던 기존 시선에서 땅을 계획하는 듯 극대화한 접근을 보여줬다. 지형적 공간, 랜드스케이프는 오브제로 서 있는 건축물과 땅의 견고한 경계를 허물고 주변 대지와 건물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개념이다.

당시 김종규 씨가 언급한 ‘지형적 공간’은 한국 건축계에 신선한 감흥을 주었다. 이런 접근은 당시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앞선 개념이었다. 물론 ‘해외에서 직수입된 최신 건축이론’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이 ‘지형적 공간’, 랜드스케이프에 대한 개념은 유럽에서도 1990년대에 와서야 본격화된 이슈다. 김종규 씨는 AA 스쿨의 졸업설계 때부터 상당히 이른 시기에 이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이 지형적 공간에 대한 김종규 씨의 탐구를 두고 AA스쿨에 함께 수학했던 필립 크리스토우는 “한국에서 가져온 땅에 대한 타고난 친숙함”을 그 근거로 설명했다는 것. “참 묘해요. 25년간 한국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십 년을 지냈어도 서양친구들은 제 사고를 상당히 동양적으로 받아들여요.” 오히려 해외에 와서야 발견한 태생적인, 한국적인 사고였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그들의 문화를 따라갈 수는 없어요. 한계를 명확히 느끼죠. 그 한계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더 명확히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그의 관심은 건축적 공간이 주는 감동보다 관계에 머문다. 그래서 건축을 지극히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일상의 환경으로 받아들인다. 1993년에 귀국, M.A.R.U라는 이름으로 사무실을 개업해 지금까지 해온 그의 프로젝트들도 같은 맥락을 지닌다. 7~8년 동안은 공모전 외에는 이렇다 할 프로젝트가 없었던 때도 있다. 명동성당 공모전에서 실현하지 못한 지형적 공간은 이후 전남 광주 의재미술관(조성룡건축연구소와 공동작업)에서 다시 적용하기도 했다. 대지는 경사지에 산자락이었다. “당연히 오브제를 만든다기 보다는 경사를 이용해서 도로를 건물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적용했어요. 땅의 레벨 차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거죠.”

노인치매시설이었던 순애원 프로젝트나 서울 청담동에 지어진 카이스 갤러리 모두 주변 건물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한 프로젝트들이다. 특히 카이스 갤러리는 청담동이라는 복잡한 주변 환경에 대한 반발이 컸다. 건축물을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동시에 복잡한 도심법규를 해결하는 것도 목표였다. 그 결과 코르텐강이라는 강렬한 외장재에도 불구하고 카이스 갤러리는 청담동 복잡한 건물군 속에 배경처럼 서있다. 벽에 창문을 내기 보다 벽과 창의 역할을 반전시켜 벽이 떠있는 식으로 접근했던 희원 갤러리나, 콘크리트벽 거푸집의 시공상 흔적을 그대로 살려냈던 사진 작가 배병우 자택 작업도 기억에 남은 작업이다. 김종규 씨는 파주출판도시와 헤이리아트밸리의 건축지침서 작업에도 참여했다. 건축을 확장해 영역이나 마을로 접근하는 방식은 그가 런던에서 작업한 라이프찌히 근교의 탄광촌 개재발 프로젝트를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그 프로젝트는 기반 시설이나 시간에 따른 변화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었다. 건축 이전의 어떤 기본적인 바탕, 즉 영역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마을 만들기, 특히 김준성 씨와 함께한 헤이리아트밸리 건축 지침서 작업은 건축 이외의 것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였다.

 “건축가들의 작업이 독단적이고 어렵다는 것은 오해라고 생각해요. 건축가의 작업은 건축주와 상관관계가 있죠. 건축가의 성향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주의 입장, 그 삶을 이해하고 대변해주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건축은 건축가의 소유가 아니므로 건축가의 이야기는 곧 건축주를 위한 이야기다. 그것을 서로 잘 이해할수록 작업의 질이 좋아질 수 있다는 것.

김종규 씨 스스로도 건축주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하지만 건축주의 의견을 꺾는 일은 없다. “저는 행운아라고 생각해요. 건축주 분들이 제 의도를 잘 이해하고 받아주셨죠. 중요한 건 건축주 역시 어떤 건축물을 원하는가를 잘 아는 일이에요.” 더 나아가 건축가의 역할도 확장한다. “이 공간이 감동적이고 좋다라는 판단도 사실 건축적인 입장이에요. 너무 건축적인 입장에서 가치 판단을 하기보다 이를 벗어나 사회적인 입장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어요. 그럼 건축도 새로운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장 누벨이 소셜 하우징(social housing)을 만들 때 똑같은 예산을 가지고 넓은 공간을 만들겠다 라고 접근한 것처럼 건축가가 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들이 있다는 거죠.” 그러니 그에게 건축은 삶의 영역을 만드는 작업이고 상식적인 선에서 접근하는 작업이다. “저는 건축을 통해서 제 욕망을 표현하는 작가는 아니에요. 의도적으로 튀지 않고 아주 평범한 어휘를 사용하고, 결국 건축주를 대변하는 전문가가 곧 건축가죠.”

글_임진영 건축전문기자

네이버 한국인 시리즈 / 현대적 상상의 최전선, 건축가 조민석

 건축가 조민석의 사무실은 건축설계집단 매스스터디스(Mass Studies)라는 이름으로 2003년 출발했다. “굳이 우리말로 바꾸자면 ‘덩어리’죠. 덩어리 연구소. 대중에 대한 학문을 떼지어 공부하기? (웃음) 물리학에서 본 개념이었어요. 이분법적인 사고를 깬다는 것. 건축을 도식적으로 생각하기보다 제 3, 4의 가능성과 힌트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매스(mass)의 사전적 의미는 ‘특정한 형태를 가지지 않은 많은 양의 덩어리’다. 동시에 ‘대중’을 말하기도 한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선 매스컬쳐(mass culture.대중문화), 매스티지(masstige. 명품의 대중화), 매스커스터마이제이션(masscustomization.대량생산과 고객화의 합성어)과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여기서 그는 어떤 건축적인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모색한다. 과연 천편일률적인 한국 사회에서 건축을 통해 ‘불균질한 대중(heterogeneous mass)’을 구현하는 것은 가능할까라는 질문이다.

지금 40대가 그렇듯 조민석 씨 역시 급격한 도시화를 몸으로 겪은 세대다. “세상에 유래 없는 도시화 과정, 도시의 변화를 목도한 세대죠. 항상 공사판이 놀이터였어요.” 어릴 적 필동의 1층 양옥집에서 들리던 남산 1호 터널의 발파 소리에 대한 기억은 생생하다. “저는 아파트를 살아 본 첫 세대일 거예요. 개인적으로 행운이라고 생각하죠. 1970년 정도에 세검정 신영 아파트로 이사를 갔어요. 어린 나이에 세상에 이렇게 큰 집은 처음인 거죠. 계단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고 옥상은 정말 기가 막혔어요. 모더니즘의 유토피아 같은 환경을 겁 없이 받아 들였죠.” 5층 규모의 편복도 아파트는 당시로서는 가장 모던한 환경을 겪게 해줬다. 지금과 달리 세대간의 커뮤니티도 잘 이뤄져 삭막함은 느낄 수 없었다. 어릴 때 곧잘 가곤 했던 한강다리 밑 교각이 만들어내는 투시도 효과는 건축적인 센세이션이었고, 엄청난 규모의 콘크리트 광장인 여의도 광장에서 자신이 개미처럼 느껴졌던 것도 잊지 못할 경험이다. “공간의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간. 어릴 때 체험을 생각해 보면 도시 자체가 유기체였다는 생각이 강하죠. 지금은 그와 반대되는 천편일률적인 환경이 강해졌고요.”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화실을 다니며 자연스레 예술을 접했다. 혼자 전시를 보러 가거나 대학생 형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앤디 워홀백남준에 열광하던 조숙한 아이였다. 미술 전공을 하려다 건축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건축가인 아버지 영향이 컸다. “여러 문화예술전집, 일본 건축잡지인 ‘a+u’나 우리의 ‘공간’ 같은 건축 저널들을 접했어요. 문화적으로 좋은 혜택을 받았죠. 건축은 미술과 많은 관련이 있구나 싶었고, 또 건축이 스케일이 더 크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사실 어렸을 땐 혼자 있는 걸 좋아했어요. 하지만  아버지 일을 보니, 건축가한테는 사회성이 많아야 하구나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더라고요. 사실 저는 지금도 사회성이 없는 편인데, (나이 들다 보니) 약장수가 다 됐어요. 누구한테 저 소극적이라고 하면 안 믿어요(웃음).”

조민석은 뉴욕에서 공부한 젊은 건축가다. 그는 대학을 마치고, 뉴욕으로 건너갔는데,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맨해튼에서 첫 3일은 마치 공중제비를 도는 듯한 기분을 맛봤다. 스펀지처럼 누구든 빨아들일 것 같은 도시, 누구나 당당하게 주인이 될 수 있는 다문화 사회. “누구나 외국 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하잖아요. 많은 것을 배워 돌아가리라, 한국인으로서 뛰어난 걸 보여주리라. 그런데 어느 순간 생각이 바뀌었어요. 내가 저들과 다를 게 없구나. 다 흡수해야겠구나. 여기서 내 집처럼 살아봐야겠구나, 생각했죠.” 제대로 배우려면 한국에 돌아가지 않을 각오를 해야겠구나 싶었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폴쉑 앤 파트너스에서 3년 정도 실무를 쌓고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OMA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렘 콜하스와 작업을 함께 한 것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큰 변화는 장소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이었다. “뉴욕과 서울을 오갈 때는 홈-어웨이, 로컬-글로벌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있었어요. 그런데 세 번째 이동을 하고 나니 어디가 홈이고 어디가 어웨이인지, 모호해졌어요. A 또는 B 가 아니라 A 그리고 B 그리고 C 그리고 D, E, F라는 것도 가능하구나 라는 걸 느꼈어요.”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동급생이었던 제임스 슬레이드와 ‘조슬레이드 아키텍처’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미 100년 전에 도시화가 이루어진 뉴욕에선 실행할 프로젝트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뉴욕은 아이디어가 넘쳐나고 현대 건축의 담론이 시시각각 벌어지는 중심지라, 직접 건축할 기회는 적었지만 젊은 건축가들이 인정받고 자부심을 느낄 기회는 많았다. “뉴욕은 정신의 산물, 무형의 가치에 대해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죠. 자본보다 예술성, 창조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젊은 건축가가 첫발을 디디기에는 좋은 토양이었어요.”

한국에 사무실을 낸 후, 그의 다원적인 건축에 대한 생각은 더 분명해졌다.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픽셀 하우스’와 ‘딸기가 좋아’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2000년대 초반, 그가 바라본 한국은 초현실적이고 역동적이었다. 한편에서는 대형설계사무소를 통해 균질적인 오피스가 만들어졌으며, 또 한편에서는 아틀리에 사무실들을 통해 독특하고 불균질적인 건축작품들이 나오고 있었다. 조민석은 우리가 이 같은 극단 사이에 있다는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건축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시장 상황은 자본주의에 완전히 타협하거나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었어요. 제3의 대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것은 이분법적인 사고를 버리고 다중성 복합성에 주목하는 그의 태도와 맞닿는다. “어떤 예술가의 말을 빌자면, 세상이 너무 혼돈스러울 때는 질서를, 반대로 세상이 너무 전체주의로 갈 때는 난리를 한바탕 떠는 것도 필요하다고 했어요. 균형 잡아주는 역할이죠. 혼돈과 질서라는 양 극단을 봤다면 저희는 그 사이에서 특정한 답을 만들어내고자 했어요.” 건축가가 당대에 기여할 수 있다면 창의성을 통해 사회에 다양성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그가 한국에서 처음 완공한 프로젝트는 ‘마틴 싯봉’이라는 인테리어 프로젝트. “2주 디자인하고 두 달 만에 공사했어요. 그리고 딱 2년 만에 없어졌죠.” 그는 이런 한국 사회의 속도를 매우 흥미롭게 봤다. “뉴욕에서 이런 일은 1년 이상 걸리니까, 정확히 한국은 6배가 빠르구나. 그러니까 월화수목금토요일이 월요일 날 다 끝나는 거예요(웃음).”

이 첫 프로젝트는 그에게 속도에 관한 고민을 하게 했다. “빠르게, 더 크게 짓다 보면 흉하게 되기도 해요. 그 속도에 다른 대안이 없을까 고민을 했죠. 자이갤러리가 바로 그런 테스트를 해본 거예요. 설계 5개월, 공사 5개월이었죠. 나름대로 어떻게 하면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복잡한 건축을 해볼까 하는 무모한 도전이었어요. 자살 골이죠. 배운 것이라면 앞으로 두 번 다시 못하겠다는 것? (웃음)”

 ‘더 크게’에 대한 고민은 바로 부띠크 모나코였다. “대부분의 건물은 규모가 커지면서 반복이 많아지고 그 반복을 통해 건축가가 돈을 벌죠. 부띠크 모나코는 어떻게 하면 돈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복잡함을 많이 만들어 볼까라는 것이었어요.” 수직 타워의 양적인 가치를 질적인 가치로 전환하기 위해, 부띠크 모나코에는 15개의 빈 공간을 두고 49개 타입으로 구성했다. 타입이 많다 보니 설계 도면만 방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법규에 따라 용적률을 가득 채운 건물이 아니라, 건물을 최고 높이로 올리고 초과하는 용적률을 건물 곳곳에서 비워냈다. 그럼으로써 내부 유닛의 다양성도 확보했을 뿐 아니라, 강남의 수직 타워들 사이에서도 시각적 다양성을 확보했다. 수직 타워 유형에 반복적이지 않되 복합적인 여유와 틈새를 만들어내는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다.

 “앞으로도 천편일률적인 공간에서 새로운 시도를 계속 해 보고 싶어요. 조형적인 측면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공간의 여유를 느꼈으면 좋겠어요. 물론 지금 한국에서는 그게 하나의 럭셔리 코드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웃음)” 비록 고급 주택시장의 상품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부띠크 모나코는 새로운 주거 유형을 제시하고 건축가의 영역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국에서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스스터디스의 이름으로 이루어낸 프로젝트들의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다. ‘픽셀 하우스’는 그가 처음 설계한 작품. 헤이리에 적은 예산으로 지어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집이다. “가장 애착이 가요. 건축주 부부가 ‘경제적인 여유는 없지만 아파트 문화를 탈출해서 헤이리에 조그만 집을 짓고 싶다, 규모는 작지만 건물이 특별해서 그게 곧 우리 정체성이 되었으면 한다’고 했어요. 건축의 영향력에 대해 저보다 더 순수하게 믿고 계셔서 감동적이었죠.” 이미 헤이리의 명소가 된 ‘딸기가 좋아’는 이미 건축가의 손을 떠나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를 가지게 된 것 같다고 말한다. 그 공간을 열광적으로 사용하는 아이들의 에너지를 통해 건축물 자체가 생명력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또 하나 그의 프로젝트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파빌리온(임시로 설치해 이동이 가능한 건축물), 공공 프로젝트들이다. 원래 ‘링 돔’은 뉴욕 스토어프론트 갤러리 25주년을 기념해 고안한 임시 구조물이다. 디렉터인 조셉 그리마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적은 예산으로 공간을 한정하기 위해 1000여 개의 훌라후프를 활용했다. 지름 8.65m의 이 원형 구조물은 훌라후프를 엮어 만들어 누구나 쉽게 설치에 참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행사가 끝난 후 다시 해체되어 훌라후프는 시민들에게 나누어 준다. 이 ‘링 돔’ 프로젝트는 이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다시 한번 설치가 되었고 2008년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에서 연달아 설치되었다. “공공적인 것은 다수를 위해 열려있는 공간이죠. 임시 가설 구조물들은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짧은 시간 안에 설치되었다가 사라져요. 한시적이긴 하지만 건축적인 아이디어를 실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공공의 의미도 크죠.”

2008년 오바마가 대선 후보 수락 연설을 한 역사적인 장소, 덴버에도 그의 파빌리온이 설치되었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다이얼로그:시티>라는 문화행사를 위해 설치한 임시 구조물이다. 이곳에서 조민석은 바람을 불어넣으면 새하얀 숲처럼 펼쳐지는 구조물을 제안했다. ‘에어 포레스트’라는 구조물이다. “파빌리온은 도시 안에 활성화되지 않는 공간들을 새롭게 고무시키는 장치라고 할 수 있어요. 건축의 견고함이나 영속성에서 자유롭다는 게 매력이죠. 하지만 그보단 그 안의 내용도 중요합니다. 사회적인 촉매제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죠.”

조민석이 기획한 <서울 꼬뮌>

 2005년 독일 에센에서 열린 <오픈 하우스> 전시에 그는 ‘서울 꼬뮌’이라는 계획안을 선보였다. 압구정동을 대지로 제안한 ‘서울 꼬뮌’은 호리병 모양의 수직 타워에 녹색 마감재를 입힌 것이다. 도자기를 연상시키는 이 창의적인 계획안을 비롯해 그의 건축물에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하며, 유머도 담겨 있다. 이를 두고 ‘치밀한 가벼움’이라고 평한 비평가도 있다. 조민석에게 창의성에 대해 물어보았다. “비교하자면, 스포츠의 경우 이미 만들어진 룰 안에서 최선의 기량을 다하죠. 창의적인 분야는 그 룰마저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해요. 동시에 보편성을 가져야 하죠.”

그는 또 말한다. “건축은 대지·위치처럼 주어진 조건에서 나온 결과물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 (조건) 안에서 하나의 유형을 만들고, 아이디어로서 결정체를 만들려고 추구해요.” 이 ‘유형’은 하나의 건축물로 끝나지 않고 지속 되는 생명력을 담고 있다. 수직 타워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해 온 매트릭스 스터디스나, 프로그램의 공간적인 다양성을 모색한 무브먼트 스터디스들이 그것이다.

건축가로서 그의 소망도 소박하다. 최소한 한국이라는 특정한 상황, 대량생산 체제에서 건축가가 반복만 피하고 살아도 행복하다는 것. 그 작은 다양성을 줄 수 있는 게 바로 건축가가 기여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저는 세계를 이해하고 관여하기 위해 건축이라는 수단을 택했어요. 제게 건축은 한국이라는 토양을 반영하고 거기서 더 나가고 싶은 열망이 투영된 것이기도 하구요.” 그는 이제 또 다른 도전을 마주하고 있다. 상하이 엑스포 한국관 설계에 당선된 것이다. 그는 한국관 계획안을 통해 한국성에 대한 단편적 해석보다 한국의 융합적인 특성을 표현하려고 한다. “국가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건물을 설계한다는 건 건축가로서 하나의 도전이자 기회죠. 떠돌이처럼 살아온 저의 삶과 문화적 정체성 때문에 이 작업은 더 의미가 있어요.”

글_임진영 건축전문기자

네이버 한국인 시리즈 / 단순한 건물에 깃든 자연미, 건축가 조병수

모든 건축가는 자신만의 어휘로 집을 짓는다. 건축가 조병수가 추구하는 건축은 굳이 비교하자면 막사발과 닮았다. 고려청자나 백자처럼 기교나 공예적 완성도는 없지만 담백한 실용의 미가 있다. 집으로 치면 시골 길가에 놓인 창고나 옛 건물 같다. 기능과 요구에 충실해서 모든 부재와 존재 이유가 분명하다. 조병수는 여기에 ‘직설적이지만 세련된’ 감수성도 담는다. 절제된 형태에서 느껴지는 성스러움이나 무심하게 만들어진 사발의 기품이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그의 건축을 두고 ‘거칢 속의 세련, 세련 속의 무심함’이라고 표현한다.

 그의 사무실은 서울 서초동의 한 상가건물 맨 위층이다. 밖에서 보면 주변에 흔한 근린시설이지만 옥상에 오르면 예상치 못한 공간을 만난다. 건물을 두 채로 나누고 빈 마당을 두었다. 건물 한 채는 2등분을 해서 다시 그 사이로 하늘을 볼 수 있는 가운데 뜰, 곧 중정(中庭)을 두었다. “비를 보고 눈을 보고, 하늘을 볼 수 있는 마당이 좋아요.” 비나 눈이 오는 날이면 조병수 씨는 마당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비를 바라본다. 그의 감수성은 이렇게 외기(外氣)와 맞닿거나 열린 공간에서 겪은 기억으로 가득하다. “어릴 적 28평 남짓한 개량한옥에서 자랐어요. 공간에 대한 기억보다 몸으로 겪은 생활 경험이 더 기억나요.” 한옥은 너무 추워 겨울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아침이면 방안의 자리끼 물에 살얼음이 얼 때도 있어요. 외국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면 말도 안돼!라고 놀랬죠. 영하의 방에서 잤다는 말이니까.(웃음)” 하지만 춥다는 게 불편함을 말하는 건 아니다. 공기는 차고 바닥은 따뜻해서, 몸만 적응하면 실내가 상쾌했다. 조병수 씨는 ‘값어치 있는 불편함’이라고 말한다.

어릴 적 집과 동네는 낮은 담장 너머 길에서 떠드는 소리가 방 안까지 밀려오고 저녁이면 옆집 젓가락 소리가 동네 불빛과 함께 넘나들었다. “달빛이었던가, 가로등이었던가, 막 잠자리에 누웠을 때 창호지에 밀려드는 불빛, 나뭇잎 그림자,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리던 미닫이문, 이런 기억이 강해요.” 빗소리와 햇살이 비치는 마당, 소나기 내릴 때의 흙 냄새. 외가의 너른 시골 마당에서는 주변의 모든 소리, 냄새, 볕, 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을 경험할 수 있는 그릇이다.

 “생각해보면 그런 경험에서 공간의 가치를 배운 것이죠. 설계하면서는 단지 그걸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 것 같아요. 아파트에서든, 개인주택에서든, 자라면서 한번 만들어진 감성은 더 추가되지 않아요. 그만큼 어릴 적 기억은 소중하죠.” 한 사람의 정서적 경험을 풍요롭게 만드는 게 바로 건축가의 몫이라는 말인 듯 하다. 이 총체적인 기억을 몸으로 겪은 건축가는 자연스레 마당 같은 외부 공간을 선호한다. “자연을 경험하면 차분해지고 정신적으로 맑아져요. 유기적인 자연을 마주하면 사람은 결국 자신의 존재 의미를 인식하게 되죠.” 그가 도가 사상이나 고유섭 씨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94년 한국에서 이렇다 할 프로젝트도 없으면서 처음 자기 사무실을 무작정 낼 때, 돈이 부족해 주택과 스튜디오를 겸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의 조건은 하나였다. 외부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게 없으면 안 되겠더라구요. 아무래도 한옥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어쩌면 천편일률적으로 지어져 외기를 접할 수 없는 도심 상가 건물 틈에서 옥상 층에 자리한 그의 사무실은 바람과 햇빛을 경험할 수 있는, 그가 찾아낸 도시의 틈새인 듯하다.

 

 건축가로서 그는 전통적인 장인과 닮았다. “모든 동물은 제 손으로 집을 지어요. 아주 중요한 사실이죠.” 그는 만들어내는 행위를 하기 위해 건축을 택했다. “어릴 적부터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꼭 건축을 떠올린 건 아니었지만 막연히 그림을 그리고 만드는 직업을 택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지남철, 찰흙, 커다란 나무 기둥 같은 물건들에 눈을 떼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텍토닉’이 아니었던가 해요. 테크니컬이 주는 아름다움이죠.”

지금도 그의 사무실 곳곳에는 막 철거된 한옥에서 가져온 기둥이나 문, 커다란 석곽이나 쇳덩어리들이 놓여 있다. 그의 수집품은 고가구 가게를 떠올리게 하지만 실상은 재료 자체가 지닌 솔직한 물성(物性)에 더 관심이 많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도예하던 친구를 따라 벽제 가마터를 찾아가 도예를 배웠던 것도 그 때문이다. “흙을 빚으며 그 성질을 배웠어요. 매번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뭔가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다가 서울에 내려왔는데, 막 지어진 세종문화회관에서 청사진과 도면, 모형을 선보인 전시를 보게 되었죠.” 그는 그 길로 건축을 공부하기로 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가 선택한 곳은 미국 서부의 작은 대학, 몬태나 주립대였다. 이유는 엉뚱하게도 마크 트웨인 때문이었다. <허클베리 핀>의 배경인 미시시피강 상류, 미주리강이 있는 서부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고등학교 때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죠. 딱히 종교는 없었고 답이 될만한 철학 책을 찾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헌책방에서 마크 트웨인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봤어요. 상당히 냉소적이라 어린 마음에도 이성과 감성에 대한 큰 의문을 남겼죠.” 마음 속에 각인된 소설가와의 인연은 젊은 동양인의 발길을 미국 서부의 낯선 대학으로 이끌었다. 몬태나에서의 생활은 건축가로서 그의 관심을 보다 명확하게 해주었다. 그 시기 몬태나에서 경험한 농업이나 산업건물에 대한 인상은 지금 그가 만드는 건축과 상통한다. “농가나 창고는 농부들의 마음을 보여주지요. 근면성실함이 배어 나오는 건물이죠. 실용적이고 솔직하고 소박함, 그런 멋이 있어요.”

 이곳에서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 밥 싱어를 만났다. 몬태나 대학 건축학과 학장이었다. 그가 한 졸업 축사는 아직 잊혀지지 않는 당부였다. “세상에 발 뻗고 잘 곳이 없거나 열악한 환경에 머무는 사람들을 위한 건축가, 책임 있는 건축가가 돼 달라”는 축사였다. “몬태나 대학에서 건축가의 사회적 책임을 배웠다면 하버드 대학에서는 ‘건축이란 건물을 만드는 것’임을 배웠어요. 물성이나 재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죠.” 라파엘 모네오가 그의 또 다른 스승이었다.

이론이나 연구보다 ‘실질’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이였다. 그래서 조병수의 건축은 차가운 노출 콘크리트에 송판 무늬를 넣거나 합판 미송 양철지붕 같은 재료를 거칠게 사용하면서도, 디테일에서는 이를 합리적으로 연결해 구조의 자발성을 드러낸다. 손으로 직접 만든 듯한 물성과 직설적인 재료의 사용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규격품으로 생산된 산업 재료를 쓰는데, 여기에는 그 지역의 재료로 그 지역의 건축방식을 따른다는 건축가의 고집이 담겨있다. 흥미로운 것은 건축가의 이 까다로운 요구를 담은 디테일을 바로 그의 동생이 실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뉴욕대학 공대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던 동생 조영묵 씨 역시 형과 함께 만드는 것에 대한 열망을 감추지 못하고 시공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의 프로젝트들의 단순한 형태가 완성도 높게 실현될 수 있었던 건 고민을 함께 해온 동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의 건축은 박스(box)에서 시작한다. 단순한 정방형의 박스는 그의 관심이 외형에 있지 않음을 말해준다. “단순한 박스지만 주변과 연계가 중요해요. 하늘과 땅과 주변 자연과 어울리게 하는 거죠.” 박스라는 절제된 형태는 덩어리라는 물성을 보여준다. 주변의 흙 하늘 공기 햇빛 같은 자연의 유기적인 성격을 경험하는 배경을 만든다. “간결한 표현이 더 강렬해요. 그래서 저는 음악도 심포니는 좋아하지 않는가 봐요(웃음)” 상자에서 출발하는 단순화 작업을 통해 그는 건축적인 원형을 찾아간다. 이는 미학적인 절제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소박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몬태나의 농업, 산업 건물에서 영감을 받은 시도다. 텅  빈 사과 상자처럼 실용적이고 솔직한 재질에는 순수함이 있다. 그는 거기 감동하고 그 효용성과 경제적 가치를 주목한다. 덧붙여 건축가 조병수는 그 사이를 흐르는 빛살과 바람까지 놓치지 않으려 한다. 이 간결함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도 있다. “강원도 화천에 지은 이외수 씨의 주택 겸 집필실을 보고 주민들이 한동안 ‘벙커’라고 불렀어요. 어떻게 다 짓지도 않은 건물에서 사느냐고요. 이외수 씨를 안쓰러워 했대요.(웃음) 이외수 씨 부부는 안목이 세련됐고, 감각도 화려했어요. 제 의도를 잘 이해해주었죠.”

 “막 골조가 지어져 공간이 실체화됐을 때 건축가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껴요. 물론 실수나 잘못된 게 가장 먼저 보여요. 어이쿠 저걸 어떻게 감추나.(웃음)” 아직 우리나라 건축 상황은 설계 비용에 대한 인식이 없는 데다 한정된 예산과 싸운다. 그래서 건축가는 해결할 일이 많다. “한정된 예산으로 좋은 공간을 만들어야 하죠. 완벽하게 고정된 마스터피스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이후에도 계속 형성되어 가는 건물을 만든다는 생각도 중요해요. 건물을 지으면서 거기서 살아갈 사람들과 상의해갈 때의 즐거움도 있어요.”

 그에게는 한국의 주거문화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재료나 생활방식에서 우리에겐 고유의 좋은 전통이 있어요. 하지만 왜곡된 게 많아요. 건축가가 할 수 있는 건 잊고 있던 주거의 가치, 원형을 발견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건축가로서 조병수 씨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해왔다.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욕망에 대한 절제, 그리고 그 정제된 원형에서 나오는 추상적 아름다움, 단순하나 본질적인 공간이 지닌 경이로움에 대한 열망. 조병수의 건축은 한국적 감성을 지니면서도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한다. 절제된 형태와 모던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외부 공간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비평가들은 “후기 모더니즘의 추상성과 동양사상의 연계 속에 ‘유기성과 추상성’을 포용한다”고 평한다. 조병수씨는 말했다. “건축이 뭘까요? 자연과 인간의 범위를 한정하고, 엮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건축가는 거기에 사람들이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는 감수성을 더해줄 뿐이죠.”

 글 _ 임진영 건축전문기자

네이버 한국인시리즈 / 현실에서 길어낸 따스한 시선, 건축가 김승회

“기독교가 국내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믿기 시작한 기독교 집안이에요. 그런 집에서 호기심 많은 아이가 나왔으니(웃음). 나쁜 짓은 하고 싶고 착하게는 살아야겠고. 갈등 속에 늘 괴로웠던 것 같아요.” 어린 그의 호기심과 갈등을 풀어준 건 문학과 미술이었다. “예술은 사회에 피해를 안 주면서 일탈할 수 있게 해요. 롤랑 바르트가 말했나요? 예술은 ‘온순한 위반’이라고. 문학이든 미술이든 안전하게 사고칠 수 있는 공간을 좋아했어요.”

하지만 고교 시절은 암흑이었다. 유신 말기, 폭압적이고 통제된 사회 분위기와 학교의 저속하고도 불합리한 요구. 이것들은 기성 세대에 대한 견딜 수 없는 환멸이 되었다. “인생이 너무 힘들었어요(웃음). 겨우 열 여섯, 열 여덟 살이었지만요. 마음 둘 곳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니체에 빠졌죠. 니체는 말해요. 오히려 어렵고 힘든 걸 극복하는 게 행복이라고. 고통, 자학을 긍정하는 거죠.” 문학은 일종의 도피처이자 ‘게토’였다. “어린 나이에 치기 어린 니힐리즘에 빠져있었죠. 문학 좋아하는 친구들과 어울렸고요. 그때는 정신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건축이라는 분야가 있더라구요(웃음). 이거 재밌겠다, 잘 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공학과 미술이 결합된 건축은 그의 흥미를 끌었다.

  

그러나 당시 건축과 수업은 실망스러웠다. “처음 과제가 1cm 안에 선을 몇 개 긋거나A4용지에 도면을 확대, 축소해오는 단순한 학습이었어요. 아마도 일본식 공업학교의 영향이 아니었나 싶어요. 잘못 생각한 게 아닌가, 자퇴까지 생각했죠.” 그가 마음을 돌렸던 계기는 10박 11일간의 건축답사 여행이었다. 안동 병산서원과 부석사 등 전국 곳곳의 사찰과 옛 건물들을 돌아보면서 옛 건축의 아름다움과 공간감을 발견했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게 되는 계기가 소설이듯이, 건축가가 되게 한 게 고건축이었죠. 좋은 건물을 많이 보면 그걸로 고무돼요. 뗄 수 없는 마약이 되는 거죠(웃음).”

대학원 졸업 후 유학을 갔던 미국의 1990년대 초반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가 막 일어나던 시기다. “모든 장르를 다 경험해 본 셈이에요. 동시에 너무 많은 실험이 쏟아져 나와 장르의 무의미함을 느꼈어요. 미국 건축가 존 헤이덕의 글에 이런 대목이 나와요. 어느 날 피터 아이젠만이 전화로 전시(1989년 뉴욕현대미술관의 해체주의 전시)에 참여하겠다고 물었대요. 참여를 거절하고 전화를 끊으면서 존 헤이덕은 이렇게 말하죠. ‘아, 피터 아이젠만이 또 새로운 브랜드를 띄우는구나’ 오히려 김승회 씨에겐 건축의 기본과 기능에 충실했던 1920년대~30년대 모더니즘 작품들이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1991년 귀국 후 그가 김종성 교수의 서울건축에서 실무를 쌓은 이유도 그것이다. 미스 반 데어 로에 사무실에서 건축을 경험한 김종성 교수는 모더니즘의 정통적인 기반을 가장 정확하고 깊이 있게 이해한 분이었다.

 1995년 일산의 한 주택 설계를 의뢰 받으면서 그는 사무실을 독립했다. “자기 작품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커져서 개업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프로젝트 하나로 개업을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던 건 정말 무모했죠. 주변 선배들이 말릴 때만 해도, ‘이분들 왜 그러지?’ 하면서 의아해했어요(웃음).” 뜻이 맞는 학교 후배인 건축가 강원필과 경영위치 건축사사무소를 열었다. 경영위치(經營位置)는 동양화에서 구도를 잡는다는 뜻이다.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사물들 하나하나의 관계에 주목하자는 의미다. “모아둔 돈 한푼 없이 시작했어요. 당시만 해도 건축사 자격증이 있으면 2천 만원까지 신용대출을 해주었죠. 그 돈으로 사무실 임대료를 내고 도면을 출력하는 플로터나 컴퓨터는 빌려왔어요. 처음 일년은 둘이서 각자 한 달에 50만원만 가져 가자고 약속했으니 인건비가 안 드는 거죠.(웃음)” 다행히 1월 달에 개업한 후 7월에 보건소 표준설계와 8월 서울대 환경대학원 신축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반 년 만에 직원도 뽑고 구색을 갖춘 사무실을 꾸렸다. 건축가 강원필과의 이상적인 파트너쉽은 디자인, 경영, 실무관리, 실시도면의 완성도 등 경영위치만의 노하우를 만들어갔다. 좋은 출발이었다.

 

경영위치를 말해주는 중요한 작업 중 하나는 보건소 연작이다. 1995년 7월 보건복지부 표준설계 공모전은 공공보건의료기관 즉 전국 보건소의 설계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설계비가 보건지소의 경우 300만원, 가장 큰 통합보건지소라도 3천 만원이었죠. 사무소를 운영해야 하는 건축가라면 제정신으론 참여 못하죠(웃음).”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이 작은 공모전에 참여하게 된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기억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간호사셨어요. 보건소는 어머니가 계신 곳이었죠. 주말근무라도 하시는 날엔 보건소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제게는 포근하고 아늑한 기억을 가진 공간이에요” 다섯 가지 유형의 표준설계를 하고 나니, 개별적인 보건소 설계 의뢰도 들어왔다. 그러나 보건소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김승회 씨는 중요한 문제와 대면했다. 보건소가 들어설 곳 특유의 지역적인 색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이다.

“지방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지역성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죠. 한국에선 사실 몇 개의 도시를 제외하고 대부분 전통적인 의미의 지역성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지역성이란 그 지역만의 형태나 구법(構法), 지역에서 생산되는 독특한 재료로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네 소도시들은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어낼 어떤 기반도 없었다. 전통과 단절한 급격한 근대화의 결과다. “다른 것과 구별되는 차이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주 중요해요. 그 지역이기 때문에 남다른 무언가를 새롭게 창조해야 하죠.” 그는 지역성을 하나의 추상적인 전제나 건축양식이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의 삶에서 찾기 시작했다. 그 지역의 지형, 오랜 시간이 쌓인 도시의 구조, 도시의 변화 과정과 주민들의 삶의 방식이 바탕이 된 것이다.

고성군, 포항시 남구, 옥천군, 홍천군, 강화군, 당진군 등 매해 진행한 20여 개(보건지소까지 40여 개)의 보건소 프로젝트는2007년 정선보건소를 마지막으로 12년의 대장정을 마쳤다. 자칫 문화공간의 소외지역이 될 수 있는 지방 소도시에 대한 한 건축가의 애정 어린 기록이다. “주민들의 긍지가 대단했어요. ‘호텔보다 멋지다’고 하더군요. 비싼 재료를 써서가 아니라 공간이 차별화되니까요. 시장님이나 국회의원들도 오시면 질투를 했어요. 보건소가 이렇게 멋있어도 되는 거냐고(웃음).”

공사비가 넉넉했던 것은 아니었다. 적은 예산에 맞춰 디자인을 하는 훈련 덕분에 적은 공사비로 디자인하는 노하우도 생겼다. 건물을 잘게 나누면 다양한 내외부 공간을 만들 수 있지만, 표면적이 늘어나 공사비가 상승할 수밖에 없다. 내외부 공간을 다양하게 만드는 대신 건물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내부에 로비나 접수처를 한 데 모은 높고 넓은 공용공간을 두었다. 이른바 공간을 오픈시킨 것이다. 단순한 윤곽을 가진 형태를 고안한 덕분에 오히려 좋은 내부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한편, 샌드위치 패널과 같은 값싼 재료를 이용해 공사비를 줄이는 방법을 찾았다. 보다 저렴한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디테일을 고민했다.

전국 오지를 다니며 ‘장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화려함이나 스포트라이트는 없었다. 하지만 건축가로서 지방의 건축문화에 일조한다는 사명감은 컸다. “상당히 고생스러웠지만 일생 일대에 보람된 기회였어요. 착한 건축을 한다라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 프로그램 자체가 착했죠.” 공공건축이 갖는 미덕은 좋은 공공건축물이 들어섬으로써 도시 공간이 나아진다는 데 있다. 도시의 공공성, 공공건축의 수준을 높이는 측면에서 보건소 연작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보건소는 시, 읍 단위 지방 소도시의 공공공간이자 주변 도시 조직과 반응하는 중심적인 공간이죠. 그래서 도시의 집적된 시간과 공간을 재구축하는 작업이에요. 도시의 구조를 파악하고 규모 있는 건축물을 어떻게 잘 앉힐 수 있을지 고민해야 했어요.” 적은 공사비와 열악한 시공환경, 지역의 문화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설득하는 과정은 힘들었다. 관계자들은 입면 구성이나 동선(動線)에 대한 건축가의 의도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했다. 입찰로 참여한 시공업체들은 단순하게 처리하고 빨리 일을 끝내길 원했다.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어요. 왜 재료를 이렇게 많이 쓰느냐, 왜 1, 2층에 모두 다 뚫린 로비를 만드느냐. 멋을 부린 게 아니라, 사람들이 들어와서 헤매지 않고 찾아갈 곳을 바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한 의도였죠. 나중에 지어진 건물을 보고 찾아오신 분들은 먼저 2층으로 트여달라고 해요. 또 어떤 보건소장님은 건물 내에 그림을 걸지 말라고 하셨어요. 건물 자체가 작품이라고요.”

김승회의 건축이 보건소로만 주목 받는 것은 다소 억울한 일이다. 첫 프로젝트였던 일산주택부터 주택 설계는 건축가 스스로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 주거의 전형에 대한 고민이다. “어릴 때를 떠올리면 마당이 늘 생각나요. 고등학교 2학년까지 항상 마당이 있는 단층집이었어요. 대청에서 뒹굴뒹굴 책을 보고, 마당에 해피라는 강아지가 있고, 포도나무가 있었어요. 꿈에도 자주 나오는 풍경이에요. 신기하게도 아파트에서 산 지 20년이 다 되었는데, 아파트 꿈을 꾼 적은 없어요. 제 잠재의식에선 아파트를 집으로 안 쳐주는 거죠(웃음).” 그에게 집은 문 하나 여닫는 것으로 마당과 방과 길이 매끄럽게 연결되는 소통의 여백이 있는 공간이다.

“도시는 밀도가 높기 때문에 아파트를 지을 수밖에 없죠. 그러면 왜 저렇게 지을까. 아파트에 대해 조사할수록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더군요. 대학원 때였는데, 건축가가 할 수 있는 몫이나 사회를 바꿀 힘이 없다는 걸 알고, 크게 절망했어요. 개업을 하면서 제 스스로에게 약속을 했어요. 이 사회가 원하는 주거의 전형을 만들자고.”

그가 주목하는 주거 문화의 문제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단위세대(유니트), 즉 자기 집에는 관심이 있지만, 그 바깥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 삶이 파편화되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현실이다. 두 번째는 건축을 평가하는 기준이 돈과 고급스런 재료에만 있다는 것이다. 건축이 공간감이나 풍경으로 평가되지 않는 풍토다. “우리의 주거 문화라는 게 상당히 솔직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욕망을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죠. 만약 주거가 천박하다면 우리가 천박한 거죠. 하지만 사람들이 아직 삶이나 집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꾸 돈으로 환산하는 것 같아요. 슬프지만 그것이 현실이죠. 그 현실을 인정해야 하구요. 하지만 집도 새로운 방식이 있다는 걸 안다면 사람들 생각도 달라질 거예요.”

 

 도시도 마찬가지다. “부모님이 직장 생활을 하셨는데, 말하자면 도시노동자 가족이죠. 도시적인 삶 속에서 자랐어요. 친구들은 시골이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향수가 있는데, 저는 그렇지 않아요. 어릴 때부터 살았던 이 도시의 삶과 풍경이 곧 고향이죠. 그래서 잘못된 도시계획이나 도시 정책이 나오면 남의 일이라고 생각 못하고 흥분도 잘해요.(웃음)” 그는 자신이 자란 고향, 서울을 칠판에 비유한다. “쓰고 냅다 지우죠(웃음). 칠판 글을 지워도  여릿여릿한 흔적이 남아요. 그런데 오래된 도시 구역 철거는 너무 깨끗이 지우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오래 된 골목 길을 보면서 옛날의 흔적을 유추해 보는 게 좋아요. 암호를 해독하듯이 말이지요. 하지만 지금 진행되는 수많은 공사 중에는 마치 사포로 문질러 버리듯이 기억마저 깨끗하게 지운 곳도 많아요. 슬픈 일이죠.”

그에게 건축은 ‘삶을 생성하는 장치’다. 현실에 뿌리 내리고, 펼쳐져야 한다. 공사 일정을 맞춰야 하고 건축주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며, 시공을 끌어가야 하는 어려움이 곧 현실이다. 이런 어려움에서도 빼어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게 건축가의 몫이다. 그래서 그가 각별히 좋아하는 시인들이 있다. “김수영이나 두보의 시는 현실에서 길어 올린 것이지요. 건축가로 살아가는 치열한 현실, 제 작업을 긍정하는데 힘이 돼요. 건축은 예술이기 이전에 현실이라는 한계에서도 끊임없이 좋은 걸 지향해야 하죠.”

 그는 건축을 ‘아름다운 예술품’이라는 ‘위대한’ 영역에서 ‘장치’라는 ‘낮은 곳’으로 끌어내린다. 그렇게 한다고 ‘아키텍처’라는 전문영역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 건축이 생명을 얻을 것 같아요. 간혹 학생들은 예쁜 꽂을 꺾어다가 꽃꽂이하듯 건축을 해요. 물론 예쁘죠. 하지만 볼품없더라도 이 땅의 척박한 환경에 바탕을 두고 건축을 해야 해요.” 그가 건축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에 비유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에게 건축은 하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람과 공기의 무게에 저항하면서 고유한 궤적을 그리며 기어이 과녁에 꽂히는 ‘화살’처럼, 현실적 어려움을 모두 뚫고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곧 건축가의 역할이다.
“굴뚝과 매연, 엄청난 석축, 간선도로의 끔직한 스피드, 단조로운 공간, 범람하는 이미지, 엉뚱한 법규들이 경영위치의 건축을 낳고 길렀죠. 그 도시의 조건을 긍정하고 그 안에서 만들 수 있는 희망을 찾는 작업이 제가 생각하는 건축입니다.”

글 _ 임진영 기자

도시의 일상으로 다가온 건축 미학

지난 몇 년간 세계적인 거장들의 화려한 마스터피스가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사이, 우리 주변에는 도시를 읽고 반응하며, 작지만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는 건축물도 들어서 도시와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스스로 아이콘이 되는 오브제이기보다 주변과 관계를 맺는 일상의 아름다움. 건축의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하는 과정은 건축에 대한 우리 사회의 합의와 안목이 도달할 수 있는 한 지점을 말해준다.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앤 드뮐미스터 까지, 실험적이며 감각적인,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건축물 들여다보자.

글_임진영 건축전문기자

가장 매혹적인 조합, 리움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도시 안의 건축물이 지닌 미학적 가치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시작은 삼성미술관 ‘리움’이었을 것이다. 기하학의 대칭적 완결성,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가치를 표출하는 형태, 외형을 드러내지 않고 대지 경계면을 따라 흐르는 세 작품은 거장의 이름에 걸맞은 품격을 드러냈다. 당시만 해도 생소했을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콜하스라는 이름은 이 흥미로운 건축물과 함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스위스를 기반으로 한 기하학 건축의 거장 마리오 보타와 자유로운 행보를 보이는 프랑스의 장 누벨, 현대 건축의 극단을 넘나드는 이단아 렘 쿨하스가 한곳에 모이다니, 어찌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조합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리움이 서울에서 현대 건축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매혹적인 공간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건축물이 우리 도시에 등장하다니!

작가 성향을 갖춘 건축가들의 등장
1970~90년대만 해도 해외 건축가들은 한국의 고층 빌딩과 공항, 병원과 같은 특수한 건축물의 설계를 의뢰받았다. 건축주들이 필요로 한 건 조직 설계를 근간으로 한 전문 설계 집단의 전문성과 노하우였다. 간혹 이름 있는 해외 건축가가 대형 오피스 빌딩을 통해 등장했지만, 아쉽게도 그들의 초기 콘셉트가 결과물까지 이어지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한국의 현실과 예산에 맞게 적절히 원안이 수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5년 리움 미술관이 실체를 드러냈을 때, 세 건축가의 이름이 주는 가치는 명확했다. 그들은 작가 성향을 지닌 – 렘 쿨하스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 세계적인 거장들이었다. 이후 강력한 미학적 가치와 완성도, 혹은 건축적 실험을 추구하는 건축가들이 초빙되기 시작하면서, 한국에는 하나둘 거장들의 마스터피스가 들어섰다.

다니엘 리베스킨트는 삼성동 대로변의 건물 입면을 캔버스 삼아 일필휘지의 탄젠트를 그려냈고 렘 쿨하스는 캠퍼스와 도시의 가교를 자처한 서울대 미술관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독일의 메르세데츠-벤츠 뮤지엄으로 더 알려진 유엔스튜디오가 갤러리아백화점 입면에 LED 조명을 수놓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도미니크 페로는 이화여대의 상징적 중심인 이화 캠퍼스 콤플렉스를 완공했고, 안양 아트밸리에는 알바로 시자의 건축 미학을 엿볼 수 있는 미술관이 들어섰다. 이질적이고도 매혹적인,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축물이다. 작가적 성향을 갖춘 해외 건축가의 등장은 우리 도시가 원하는 바를 대신 말해주었다. 바로 건축의 미학적인 가치다.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건축
건축물의 가치가 형태나 상징성·외관의 이미지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만들어낸 과감한 형태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더 많은 해외 건축가들이 등장하면서 건축물을 대하는 시선도 달라졌다. ‘명품(?) 건축’이라는 민망한 수식어는 그들을 하나의 아이콘으로 만들고 주변 건물들과 구분했다. 차별화된 디자인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최근 몇 년간 아파트나 오피스텔의 영역에서도 VVIP 마케팅 전략으로 내세운 것은 디자인이었다.
상업 영역에서는 스타 건축가의 이름이 지닌 파급력으로 브랜드 가치를 높였다.

도시도 이름 있는 건축가와 아름다운 건축물을 통해 상징성을 얻고 싶어 했다. 프랭크 게리의 빌바오 뮤지엄이 주는 이른바 ‘빌바오 효과’처럼, 건축의 미학적 가치는 아이콘에 대한 도시의 열망으로 이어졌다. 장 누벨, 벤 반 베르켈이 아파트 설계에 기용되었고, 여러 도시가 쿱 힘멜블라우, 알바로 시자, 자하 하디드 등의 이름을 얻었다. 건축가의 이름이 화려해지면서 아이콘의 성격은 더 강해졌다.

대형 자본을 내세운 개발 사업과 도시의 문화 전략에서 아이콘과 스타 건축가의 밀월 관계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시를 풍요롭게 하는 미학적 가치는 유명 건축가의 이름에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해외 건축가에 의존한 이 들뜬 잔치가 진행되는 동안, 한편에서는 조용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상징적 건축물 하나에 의존하는 대신 공공 예술 프로젝트처럼 도시 곳곳의 빈틈을 파고드는 소박한 공간 만들기라든가, 형태적인 화려함에서 한 걸음 물러나 건축 본연의 가치에 주목한 건축물들이 조금씩 도시의 일상을 채웠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건축물이다.

건축 미학, 일상으로 들어오다
청담동에 들어선 ‘Be_Twixt’나 최근 단양에 들어선 ‘한일시멘트 방문센터-게스트하우스’에서 건축가 조병수는 콘크리트가 가진 물성을 실험했다. 새로운 콘크리트 사용법은 건조하고 차가움으로 대변되는 콘크리트에 감성을 담고자 한 시도였다. 청담동 ‘Be_Twixt’에서는 레진 재질의 작은 원형 창을 냈는데, 이곳을 통해 잔잔하게 새어나오는 빛은 견고한 벽면에서 숨을 내뿜는 구멍처럼 느껴진다. 여기에 커다란 전면 창에는 영상물을 쏘아 올려, 건물의 입면은 한 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달콤한 콘크리트 만화경이 된다.

‘Be_Twixt’가 빛과 영상물로 콘크리트에 표정을 부여했다면, 한일시멘트 게스트하우스는 콘크리트 자체를 패브릭처럼 표현한 건물이다. 패브릭 거푸집으로 떠내어 마치 자유롭게 출렁이는 천을 둘러친 듯한 질감은 콘크리트의 유기적인 형태라는 모순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폐콘크리트를 재활용해 철망에 넣어 구성한 입면은 친환경에 대한 의미뿐만 아니라  헤르조그 & 드 뫼론이 설계한 나파밸리 도미누스 와인 저장고의 디테일에 대한 오마주를 보여준다. 이로써 콘크리트는 건물을 구축하는 무표정한 벽이 아니라, 질감과 생동감을 담는 감성적인 재료가 된다.


물성, 은유, 감성을 말하는 건축
건축은 은유를 통해 시가 되기도 한다. 개관을 앞두고 있는 알바로 시자의 ‘미메시스 뮤지엄(파주출판도시 소재)’이 시적 은유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라면, 제주도 ‘핀크스 미술관’은 자연에 대한 은유를 보여주는 건축이다. 물과 바람, 소리와 빛을 끌어들인 ‘수, 풍, 석 미술관’은 건축 자체가 전시물이 되는 명상의 공간으로 조성됐다. 2006년 재일 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이 설계한 이 구조물은 그의 대표작인 포도 호텔 근처, 비오토피아 타운하우스 내에 들어선 전시관이다. 깊은 사색을 이끌어내는 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건축가는 개성을 절제하고 조형의 순수함을 얻고자 했다.

여기에 2009년 여름 ‘방주 교회’까지 들어서면서 핀크스 주변 대지에 시처럼 새겨진 은유의 건축은 하나의 완결점을 찍었다. 마치 물고기의 비늘이 반짝이듯 경쾌한 지붕의 디테일은 변화무쌍한 제주 하늘의 풍경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지만 재료의 질감과 조형성을 통해 건축물 자체를 체험하도록 이끌었고, 그 결과 건축물이 담을 수 있는 추상적인 여백을 통해 자연을 담고 치유를 권한다.

꼭 비싼 건물만 좋은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계동의 ‘데미안 빌딩’은 효율성과 경제적인 논리가 가장 첨예하게 맞서는 근린 생활시설에 건축가의 생각을 담은 예다. 건축가 김승회는 소규모 상가들이 밀집한 대로변의 천편일률적인 덩어리를 잘게 나누려는 듯, 건물에 수직 줄무늬를 그어 내렸다. 임대 건물의 상업적 욕망과 도시 풍경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고자 하는 건축가의 욕망은 외관을 분절시키는 수직 바의 형태에서 접점을 찾았다. 마치 바코드의 선처럼 불규칙적으로 그어 내린 콘크리트 선은 어느 것이 기둥이고 표피인지 구분이 모호하다. 덕분에 데미안 빌딩은 층층이 쌓아 올린 주변 건물과 달리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된다. 1층 진입부나 건물 후면에 빈 공간을 마련한 것은 경제 논리 내에서도 충분히 여유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의지의 반영이기도 하다.

시선을 사로잡는 건축
2008년 완공된 ‘부티크 모나코’와 ‘어번 하이브’는 커튼월로 반복되던 수직 타워 틈새로 새로운 유형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부티크 모나코는 형태적인 새로움이 아니라, 기준 층이 반복되는 도미노 시스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먼저 건축가 조민석은 무한 반복되는 기존 오피스텔의 틀을 깨고 49개의 다양한 유닛을 통해 불균질한 타워를 만들었다. 외부에서 보면 건물 전체에서 마치 15개의 덩어리를 파낸 듯한데, 최대 높이까지 건물을 높이고 넘치는 용적률만큼 부피를 덜어내 건물 전체의 여백으로 삼았다. 이곳은 수직 정원으로 쓰인다. 건축가가 준수해야 할 법적 기준이 주어진 한계가 아니라 디자인의 출발이 된 셈이다.

커다란 타공이 반복되는 어번 하이브는 그 입면이 곧 구조라는 점에서 형태적인 새로움을 뛰어넘는다. 원형 패턴의 반복을 통해 건물의 표피가 곧 구조가 되도록 해, 기준 층의 수평선이 반복되는 주변 타워와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주상 복합 빌딩인 부티크 모나코나 오피스 타워인 어번 하이브나 외관의 독특함만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아니다. 두 건물 모두 저층부의 공용 공간을 대로변에 열어두어 사람들이 쉽게 접하고 유입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외부와 단절된 오피스 타워의 로비와 달리, 두 건물 모두 저층부의 거대한 구조물 사이로 열린 공간을 만들어 강남대로를 걷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게 한 것이다.

자연을 입은 혼성적 유기물, 앤 드뮐미스터 플래그십 스토어
유기적인 존재를 자처하는 건축물의 등장은 재료와 형태, 구조에 대한 건축의 실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신사동 도산공원 근처, 빽빽하게 들어선 콘크리트 건물 사이로 보이는 ‘앤 드뮐미스터 숍’은 수호초를 뒤집어쓴 이질적인 건물이다. 녹색 식물을 두른 유연한 외관과 달리, 숍이 들여다보이는 실내는 커다랗게 입을 벌린 어둑한 동굴과도 같다. 여기에 기둥 없이 매장 전체를 지지하고 있는 콘크리트 셀 구조와 내부를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지오텍스타일의 외벽, 유기적으로 뻗어 내려온 계단과 백색 공간, 축축한 이끼로 덮인 내부 벽은 마치 건축물 자체가 숨을 쉬는 커다란 화분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장식적이지 않고 잘 쓰이지 않을, 더구나 서로 어울리지 않을 소재를 재치 있게 섞어내는’ 아방가르드하고 마니악한 앤 드뮐미스터의 패션은 바로점에서 ‘진지하지만 엄중하지 않고, 세심하지만 실험적이며, 강하지만 감각적인’ 조민석의 건축과 만난다. 녹색 외피를 둘러싼 장난꾸러기처럼 자연·인공, 외부·내부가 아무렇지 않은 듯 서로 융화하는 공간이다. 건축가는 기존 건물의 안과 밖을 뒤집어내고 식물을 둘러내 앤 드뮐미스터를 하나의 혼성적 유기물로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 여기에 커다란 콘크리트 셀을 만들어냈고, 자연과 벗하는 풍경을 담는 것을 넘어 자연을 입은 건축을 만들어낸 것이다.

식물을 건물의 외장재로 적극 수용하는 에코 건축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 소박하고 사치스러운 공간의 미덕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하나의 완결된 건축물, 물리적 구축물에 머무르던 건축 대신, 끊임없이 가꾸고 다듬어야 하는 유기체의 건축을 수용한 것이다. 이 건물은 살아 있는 식물과 이끼를 두르고 있다. 철마다 끊임없이 살아 숨 쉬고 단장하는 건축물을 수용한다는 것은 손익을 셈하는 가치로는 답을 낼 수 없다. 이것은 건축물의 형태적인 화려함을 벗어난 안목에 관한 문제다.

홀로 오브제가 되어 서 있는 건축물 대신 대로의 뒷골목에 숨어 수호초를 둘러쓴 건축물의 존재는 어쩌면 우리 사회가 도달할 수 있는 건축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사회적 합의, 그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지난 몇 년간 등장한 이 건축물은 스스로 아이콘이 되는 오브제가 아니라, 주변과 관계를 맺는 일상의 건축이다. 도시 혹은 자연에 반응하며 물성, 은유, 감성 그리고 친환경과 자연이라는 건축의 또 다른 가치를 풀어내는 건축물이 늘어날수록 우리는 더 다양한 도시의 표정을, 더 다양한 이야기를 갖게 되지 않을까?

1,3 앤 드뮐미스터, 조민석, 2007.  photo by 김용관
2 하늘의 교회, 이타미 준, 2009. photo by 임진영
4 어번 하이브, 김인철, 2008. photo by 김용관
5 부티크 모나코, 조민석, 2008.  photo by 김용관
6 안양 알바로 시자홀, 2006. 사진 안양공공예술재단 제공
7 한일시멘트 게스트하우스, 조병수, 2009. photo by 임진영
8 삼성미술관 리움, 2005.  photo by 이한구
9 중계동 데미안 빌딩, 김승회, 2009. photo by 김재경
10 부산영상센터 당선작,  쿱 힘멜블라우,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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